우리나라에서 해외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부, 특히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해 있어 자연스럽게 주변 국가들과 접촉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가장 초기 형태의 해외교역은 고조선과 중국 연나라 사이의 교류로 알려져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청동기 문화의 확산과 함께 중국 북방의 여러 국가들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철기·비단·도자기 등을 수입하고 자체 생산한 청동 제품과 농산물을 교환했다. 또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가야의 철 생산이 활발해지며 왜(일본) 지역과 자연스러운 무역이 이루어졌다. 가야의 철은 일본의 무기 제작과 농기구 발전에 중요한 원료로 사용되었고, 이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가장 초기 상업적 관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즉, 고대의 해외교역은 주변 국가와의 필수적 생존·문화 교류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었으며, 한반도는 이미 이 시기부터 동아시아 교역망의 일부였다.
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해외교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구조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신라와 백제의 해상 교역 능력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서해안과 가까워 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뛰어났으며, 서해를 가로질러 중국과 직접 외교·무역을 수행했다. 백제의 장인과 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도 깊이 기여했다. 반면 신라는 당나라와 안정적인 교류를 유지했으며, 실크로드 해상 루트를 통해 중동·동남아 지역의 유물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될 정도로 광범위한 무역을 경험했다. 고구려 역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기반으로 중국 북조, 유목민 세력과 왕래하며 말·가죽·철기 등을 중심으로 교역을 전개했다. 즉, 삼국 시대는 한반도 각 국가가 능동적으로 해상·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교역 정책을 운영한 시기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해외교역은 또 한 번 큰 전기를 맞이한다. 고려는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바탕으로 송나라, 여진,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과 활발한 무역을 진행했다. 특히 송나라와의 교역은 매우 활발했는데, ‘벼슬 없는 송나라 상인’이라는 의미의 **송상(宋商)**이 개경과 예성강을 오가며 빈번히 활동했다. 이 시기 고려는 은, 인삼, 직물, 자기 등을 수출하고 송나라로부터 비단, 약재, 서적, 도자 공예 기술을 들여왔다. 특히 고려청자 수출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또한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고려가 이미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 기지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는 세계 여러 나라들과 활발히 연결된 국제무역국가로 성장했고, 이는 동방의 ‘개방된 왕조’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적 통치와 명·청과의 질서 중심 외교 때문에 교역이 제한적일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합법적·비합법적 통로를 모두 활용한 상당한 규모의 해외교역이 지속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을 통해 명·청과 교류했으며, 일본과는 대마도를 매개로 한 세견선(무역선) 파견 제도가 이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과 조선은 은, 동, 직물, 도자기 등을 교역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시장 경제가 확대되며 중국 상인·일본 상인과의 민간 무역이 크게 증가했다. 연안 해안가에서는 밀무역 역시 빈번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중국과 일본의 선진 문물을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여 경제·학문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결국 조선 시대 해외교역은 공식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확대되었으며, 19세기 이후 개항과 함께 근대적 국제무역 시대로 이어지는 기반을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