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풍습으로 읽는 한국 사회의 변화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풍습으로 읽는 한국 사회의 변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모두 한반도를 대표하는 중세 왕조이지만, 그 사회를 지탱한 가치관과 생활 풍습은 상당히 달랐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비교적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했으며, 신분 간 이동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일정 부분 인정되었다. 반면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질서와 규범, 예절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이념의 차이는 혼인, 장례, 의복, 명절, 여성의 역할 등 일상적인 풍습 전반에 깊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의 풍습을 비교하는 것은 단순한 생활사 비교를 넘어,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먼저 혼인과 가족 제도에서 두 시대의 차이는 뚜렷하다. 고려시대에는 ‘서류부가혼’이라 불리는 혼인 풍습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남성이 여성의 집에서 살며 처가 중심의 생활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로 인해 여성은 혼인 후에도 친정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비교적 독립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재산 상속 또한 남녀가 비교적 균등하게 이루어졌고, 이혼이나 재혼도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화되어 ‘친영제’가 정착되었고, 여성은 혼인 후 시가에 속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재산 상속은 점차 장자 중심으로 변화하였고, 여성의 재혼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을 국가 질서의 축소판으로 인식한 조선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종교와 의례 풍습에서도 고려와 조선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고려는 불교 국가로서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대규모 불교 행사가 국가 차원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왕실과 귀족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찰은 종교 공간을 넘어 교육과 구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장례 또한 불교식 화장이 널리 행해졌고, 내세와 윤회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생활 전반에 스며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성리학적 예법을 중시하여 제사와 장례, 상례 절차를 엄격히 규정했다. 화장보다는 매장이 일반화되었고, 삼년상과 같은 유교적 상례가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제사는 조상을 섬기는 핵심 의례로서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풍습이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상생활과 의복,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두 시대의 차이는 분명하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외출하고 사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화려한 색상의 의복과 장신구를 착용하는 데 큰 제약이 없었다. 귀족 여성뿐 아니라 일반 여성들도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남녀유별 사상이 강조되면서 여성의 외출이 제한되었고, 의복 역시 신분과 성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다. 여성은 주로 가사와 자녀 교육을 담당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현모양처’라는 이상적 여성상이 확산되었다. 이처럼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풍습의 변화는 자유와 개방에서 규범과 질서로 이동한 사회적 흐름을 보여주며, 오늘날 한국 문화 속에 남아 있는 전통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